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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들

세계 미스터리들


이스터 섬의 거대한 석상

 

 남태평양의 한복판에 외롭게 떠 있는 조그만 화산섬 이스터 섬에는 아

 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이 섬은 폴리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피트케인 섬으로부터 동쪽으로 1700km, 서쪽의 칠레로부터 3700km나 떨어져 있으며, 1888년부터는 칠레의 영토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 작은 섬에는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석상들이 1000여 개나 흩어져 있다.                               

 이 석상들의 크기는 평균 높이가. 3.5m~4.5m, 무게는 20톤 정도이지만, 큰 것은 높이 10m, 무게가 90톤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처럼 엄청난 석상을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 들이 활발히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제독 야곱 로헤벤이었다. 그는 전설의 나라인 데이비스랜드를 찾아 항해하던 중 1772년에 이 섬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에는 이 섬에 약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는데, 그들의 생활은 석기 시대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사람을 잡아 먹는 등 매우 야만적이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62년에는 페루의 노예상들이 이곳에서 10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1877년경에는 인구가 100여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석상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추측과 주장이 나왔다. 노르웨이의 학자 하이에르달은 남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이 석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수준은 이렇게 먼 곳까지 항해를 할 수 없었고, 이 섬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전설 등으로 보아 그 주장은 매우 근거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4~5세기 정도에 서쪽의 폴리네시아에서 원주민들이 건너왔으며, 이들의 후손들이 석상을 세웠다고 믿고 있다.

 

이스터 섬의 전설:이 섬의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스터 섬에는 귀를 잡아당겨 길게

 늘인 장이족들에 의하여 통치 되었는데,귀가 짧은 단이 족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아후(제사지낼 때에 쓰이던 일종의 제단)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장이족들은 단이족들에게 섬에 있는 모든 돌들을 치우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화가 난 단이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통치자들인 장이족들을 내쫓았다. 장이족들은 이 섬의 동쪽에 포이케 반도로 쫓겨가서 커다란 참호를 팠다. 단이족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단이족들을 이 속에 몰아넣고 불태워 죽이려는 목적이었으나, 이 계획이 누설되고 말았다. 단이족들은 장이족들을 후방에서 공격하여 그들을 불 구덩이 속에 몰아넣었다. 장이족들은 두세 명만 남고 모두 죽었다. 오늘날 이스터 섬의 주민들 중에는 자기가 장이족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 전설을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포이케 지역에서 깊이 4m, 길이 12m인 참호의 일부가 발견 되었다.

 이 전설로 미루어 보아, 참호의 불은 크게 번져 이 섬에 무성했던 숲들을 모두 태워 버렸을 것이고, 그 후에는 석상을 만들지 않았고, 운반하던 석상도 도중에 버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 석상은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운반했을까?
 석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석상을 만들 바위 주변에 도랑을 파고 그 안에서 작업을 한 다음, 석상이 완성되면 나무 껍질로 만든 밧줄을 이용하여 경사면 아래로 끌어내려나무 썰매를 석상에 붙이고, 이것을 밧줄로 끌어당겨서 운반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정확한 해답은 모아이와 관계된 문화재인 롱고롱고 목판을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롱고롱고 목판을 땔깜으로 쓰는 바람에는 지금은 약20 여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스톤헨지(Stone Henge)

 

영국 남부 솔즈버리 평원(Salisbury Plain)에는 대략 기원전 1900년경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1600 년경 신석기 시대 말기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거대한 석조물이 있다. 무려

 4톤에 달하는 거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으며 그 중 청석(blue stone)들은 여기에서 500킬로 넘는 곳에서 실어 왔다고 한다.

세상 어디든지 여행하려 할 때는 기차, 버스, 도보가 필수적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직접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살펴볼 때, 유적지의 숨겨진 이면과 환경을 동시에 옅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때는 1986년 9월 관광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주머니 사정도 있기는 하였지만 혼자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기차와 버스가 나름대로 잇점이 있어서 그렇다.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주변을 구경할 수도 있고, 교통편이 안좋으면 안좋은대로 비록 몸이야 힘들지만 도보로 구경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유적의 뒷모습과 주변 환경을 알게된다. 런던에서부터 솔즈버리까지 기차로 가서 다시 버스로 스토운헨지까지 가게되었는데, 산많고 계곡이 수없이 널려진데서 살아온 필자로서는 이 솔즈버리 평원은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만큼 기차나 버스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실 이 스토운헨지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이미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었고, 대강 이야기도 들은 터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 곳에 도착하여서는 너무 기대감이 컸었던 탓인지, 오히려 평원에 비해 자그마한 광경에 실망조차 느꼈다. 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솔즈버리 평원 한가운데 우뚝 서서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거대한 돌덩어리들은 현재 우리들이 알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무었인가가 과거에 이 드넓은 평원 한가운데서 벌어졌었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한다.

석기시대의 신전이라 할까 아니면 이 스토운

 헨지를 연구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별이나 태양과 관계가 있는 건물이라 할까, 아무튼 평원

 에 이러한 거석들을 멀리서 갖다놓은 데엔, 그 나름대로 이유가 분명히 있었으리라. 이 곳은 이 돌들 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근처에는 이 스토운헨지와 구조가 비슷하고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 우드헨지(woodhenge)도 있고, 또한 우리나라 고분과 모양이 흡사하고 아브버리에 있는 실버리 힐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자그마한 구릉의 바로우(barrow)도 있다. 그리고 스토운헨지 아래 쪽으로는 흙으로 둔덕을 길다랗게 만들어 놓았는데, 폭이 20미터이고 길이가 장장 2킬로미터나 되며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이를 커서스(cursus)라하며 영국이 로마의 통치를 받을 당시에 마차 경주장이었을 것이라고는 하는데, 마치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고속도로같다는 느낌이며, 당치않은 생각이지만 어찌보면 스토운헨지가 공항 관제탑이고 이 커서스는 활주로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신전으로 사용되었었다는 이 스토운헨지는 처음에는 로마 유적지로 알려지다가 수차례 발굴및 조사 과정에서 그 역사가 석기시대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실상 부근의 바쓰(bath)라는 도시는 로마의 유적지이다. 고대에서 부터 원시인들이 숭배했던 초인적인 힘, 그 힘을 이 곳 스토운헨지는 너무 적나라하게 고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전설 속에서는 멀린(merlin)이라는 마술사가 공중으로 돌을 날려 이 스토운헨지를 만들었다고 하나 이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석기시대 인간들이 이를 만들었다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돌들이고 또한 운반거리조차 상상을 초월하고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곳으로 이끌게 하는 것인가, 단지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요즘에도 드류이드 교인(Druids)들이 하지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 곳은 원시시대 인간의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는 그 대표적인 증거물임과 동시에 현시대 인간들이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기도 하는 곳이다. (1986년 촬영, 1996년 작성)

 

 

아틀란티스 제국

 

'

아틀란티스는 일종의 낙원으로,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섬으로 아름답고 신비한 과일이 나며, 땅 속에는 온갖 귀금속이 풍부하게 묻혀 있고, 도시의 심장부에는 금을 입힌 첨탑을 제외하고는 모든 건물이 은으로 덮여 있는 매우 부강한 나라였다. 그런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점점 탐욕 수러워지고 부패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신이 노여워하여 재앙을 내렸는데, 그재앙으로 대지진과 홍수가 일어나하룻낮 하룻밤 만에 아틀란티스 섬은 영원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모든일이, 9000년 전에 일어났다.

 위의 이야기는 옛날 그리스의 대철학자 플라톤이 지은 <대화편>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나오는 이야기의 줄거리로서 아틀란티스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아틀란티스는 실제로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의 위치는 어디인가?'하는 점이다. 아틀란티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게 된 것은 약 100여 년까지만 해도 신화적인 존재로 간주되어 왔던 트로이와 미케네의 에게 문명이 발굴되면서부터 이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 한복판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많은 탐험가들이 대서양을 진지하게 탐사했었고,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자, 이곳은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크레타 섬이 아틀란티스의 일부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 무대는 크레타 섬과 산토리니 섬이었는데,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는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에서 그리스 시노하에 나오는 궁전을 발굴하였다.크레타 섬은 매우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기원전 1500년경에 갑자기 폐허가 되었는데, 그 원인이 지진이라고 에번스는 주장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 후, 1939년에 그리스의 고고학자 마리나토스는 산토리니 섬에서 화산 폭발과 함께 일어난 해일이 크레타 섬을 덮쳐, 크레타 섬의 중심지는 폐허로 변했다는 학설을 발표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화산은 기원전 1600~1500년에 폭발하였는데 그때, 함께 일어난 해일이 엄청났기 때문에 훨씬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편, 1967년부터 마리나토스는 산토리니 섬을 발굴하여 30~40m 두께의 화산재 아래에서 고대 문명의 도시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산토리니의 재난이 있기 전에 크레타는 매우 번영하였던 섬나라로 지중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때,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산토리니 화산이 터저지기 전은 기원전 1600~1500년 저옫가 되는데 그 당시 이집트에는 고대 문명이 발달했을 때이므로, 크레타와 이집트는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토리니 화산이 터져, 그영향은 이집트까지 미쳤고, 그 후에 크레타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자, 산토리니 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집트 인들 사이에 전해 오다가 솔론이 알 게 되어 플라톤까지 이어지고, 플라톤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책으로 남긴 것이 아닐까? 더구나 산토리니 섬의 멸망과정과 발굴된 후의 모습은 플라톤이 묘사한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에도 문제점이 많다. 먼저 플라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 9000년 전이라고 했는데, 산토리니 화산 폭발은 1600~1500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위치가 너무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주장에 대해 새로운 반론이 나왔다. 당시 이집트 인들은 해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잘못 알았으며, 플라톤이 말한 9000년 전이라는 것은 실제로 900년을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는 산토리니 섬과  크레타 섬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하는 곳들:아조레스 제도, 바하마 제도, 산토리니 섬 크레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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